베일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타카 가스가, 전임 고문이었던 에롤슨 휴와 함께 퍼포먼스 의류 산업의 시작을 이야기 합니다.
사진: 폴 원 정 [PARIS 에서]
타카: 2019년 가을이 베일런스 출시 10주년이었는데요. 에롤슨씨는 09년에 베일런스가 런칭 되었을 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맡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베를린에서 만났을 때 들은 내용도 있지만, 먼저 베일런스가 나오기 전의 시절을 이야기해보고 싶군요. 아크로님(Acronym)을 1994년에 설립하신 거죠?
에롤슨: 아크로님은 원래 두 개의 회사였습니다. 처음엔 프리랜스 디자인 에이전시였는데 일이란 일은 기회가 될 때마다 맡아서 하다가 나중에는 좀 더 전문화되었어요. 파트너였던 미카엘라 사첸바허와 함께 스노보딩 계약건을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기능성 아웃도어 의류에 대해 배우게 되었죠. 나중에 99년에는 우리만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두 번째 회사를 설립했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같은 해에 아크테릭스가 첫 번째 아웃도어 의류를 출시했을 거예요. 우리의 첫 시작을 두고 전 의류계가 놀라워했죠. “얘네 뭐지?”라는 반응이었어요.
타카: 그때가 아크테릭스 전임 CEO인 톰 헤아브스트(Tom Herbst)를 만났던 때인가요?
에롤슨: 맞아요.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가 WaterTight 지퍼에 대해 이야기했고, 샘플을 몇 개 보내주겠다고 했죠. 그런데 당시에 어디 가서 구할 수도 없었던 지퍼를 샘플만 보낸 정도가 아니라 자세한 세부사항과 함께 지퍼의 패턴까지 알려준 거예요. 그때 배운 지퍼를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죠. 그에게서 받은 지퍼를 처음 적용해 출시한 제품이 2002년도에 Kit-1 재킷이에요.
타카: 기능성 디자인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에롤슨: 근본적으로는… 많은 이유가 있죠. 먼저 저희 부모님이 두 분 다 건축가였는데, 보모를 고용하지 않으셔서 저는 동생과 함께 부모님이 계신 스튜디오에서 자랐어요. 두 분 다 늦게까지 일하셔서 저희 형제는 수많은 건축 서적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제도기를 가지고 놀며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었죠. 그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또 제가 배운 무술도 한몫 했는데, 10살에 배우기 시작한 가라데에서 의복에 따라 가능한 동작이 있고 제한된 동작도 있음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 거예요. 제가 바지 사달라고 미친 듯이 조르는 덕에 엄마가 많이 힘들어하셨죠. 떼쓴다고 옷 갈아입으면서 운동화를 던지고 그랬으니깐요. 아마 이런 것들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 기능성 의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무언가 기능적이지 않으면 짜증이 난달까요.
타카: 베일런스 프로젝트가 시작된 시점은 언제인가요? 톰을 처음 만나고도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베일런스가 나왔기 때문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에롤슨: 네, 맞습니다. 톰을 처음 만난건 아크로님이 있기도 전이었죠. 계속 연락하며 지내다가 톰이 뮌헨에 있는 저희 스튜디오로 찾아오기 전까지는 ISPO에서만 가끔 보는 정도였어요. 톰은 우리의 프로젝트에 항상 관심이 있었는데 나중에 제가 그를 보러 아크로님의 프로토타입 제품 몇 개를 들고 밴쿠버로 가기도 했죠. 저희의 첫 제품 데모도 그때 진행되었는데, 제 스튜디오가 아닌 톰과 타일러 조던(Tyler Jordan_아크테릭스 전임 CEO)이 있던 밴쿠버로 제가 직접 간 거예요. 그때 긴장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타일러는 아크테릭스 남성복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는 친구였어요. 2007년에 본격적으로 브랜드 설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죠. 당시에 아크테릭스 내에서도 그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소수뿐이었는데, 베일런스가 해결해야 할 기능적이고 실질적인 솔루션이 있음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 또한 우리의 임무 중 하나였어요. 도심 속에 있는 것과 산속에 있는 것은 몇가지 변수들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같기 때문이죠.
타카: 베일런스에서 일한 기간은 얼마나 되고, 초창기 핵심 멤버에는 누가 있었나요?
에롤슨: 2.5 - 3년 정도 일했어요. 2007년부터 처음 제품을 출시했던 2009년까지요. 멤버는 톰, 타일러, 콘로이(Conroy), 그리고 프로젝트 매니저였던 케이트 패터슨(Kate Patterson)이 있었고요.
타카: 케이트는 오늘날 스태판 만(Stephen Mann)과 베일런스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었죠.
에롤슨: 스톤 아일랜드 쉐도우 프로젝트의 두 번째 발표회가 있던 날, 제가 베일런스에서 고문으로 일한 지 한두 달 정도 되었을 때이죠. 당시에 스태판은 에이터 스룹(Aitor Throupe) 소속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제가 케이트를 초청했는데, 그렇게 스태판은 아크테릭스를 처음 알게되었고.그가 팀에 합류하기까지는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제가 떠날 즈음에 그가 컨설팅을 시작했던 것 같아요.
타카: 결국 베일런스와 가장 오래 일한 사람 중 한 명이 된 스태판은 콘로이가 떠난 빈자리를 채웠다고 할 수 있죠.
에롤슨: 제가 아크테릭스에게 그를 강력하게 추천한 이유는 아크테릭스에 없었던 몇가지를 그가 채워줄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는 남성복에 대한 이해가 그 누구보다 깊었으며, 브랜드의 가치를 바꿀 수 있는 작은 세부사항들에 조언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죠.
타카: 아크테릭스의 기존 라인업과 베일런스는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었나요?
에롤슨: 타일러는 우리가 아크테릭스의 모든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어요. 그리고 새로운 방향이 아크테릭스와 양립 할 수 있기를 원했어요. 아크테릭스가 활동에 중점을 둔 디자인 솔루션을 추구했다면 베일런스는 조금 더 지리학적인 디자인 솔루션에 기반을 두고 변화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형식의 기능성 의류는 한 가지 활동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데, 이는 우리가 하루에 한 가지 활동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한편으로는 더 어려운 도전이었고 넘어야 할 장애물도 더 많아진 거예요.
타카: 이름은요?
에롤슨: 케이트를 통해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 작가를 알게 되었어요. 아마 둘이 친척 관계였을 거예요. 어느 날 회의에서 우리는 남성복의 틀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버즈 릭슨(Buzz Rickson) MA-1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하자 케이트가 무심코 버즈 릭슨이 지난주에 그녀의 삼촌을 보러 왔다고 말했죠. 우리 전부 눈이 동그래져서 “뭐라고? 너희 삼촌이 누군데?”라고 물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렇게 저는 윌리엄 깁슨과의 점심 식사에 초대받았고 그 자리에 아크로님 재킷을 입고 나타났던 그의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꿈만 같은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다음 회의에 참석하게 된 윌리엄은 콘로이나 저보다 군복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죠. 이제 프로젝트의 이름을 결정해야 했는데, 윌리엄이 스푹 컨트리(Spook Country)라는 책을 막 끝낸 시점에서 작중 인물 중 한 명이 연마하는 러시아 무술인 시스테마에서 유래된 시스템 A(System A)라는 이름을 제안한 거예요.
타카: 베일런스가 시스템 A로 불렸던 PDF 자료가 아마 제 컴퓨터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예요.
에롤슨: 아마 저희가 처음 서로 연락하게 된 계기도 타카 씨가 이것에 관한 글을 올려서죠?
타카: 제 전 직장 상사였던 개리가 어느 날 책상 정리를 하다가 오래된 서류들을 발견했고, 제가 글을 올렸죠.
에롤슨: 베일런스라는 이름은 veiling(덮어 감추기), covering(덮기), surveillance(감시)라는 단어들에서 비롯된 거예요. 우리는 기존에 없던 단어를 원했죠. 어떤 단어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검색엔진에 나오지 않는 단어를 원했어요. 몇 달을 고민하다가 결국 타일러가 제시한 기한을 지키기 위해 이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 그가 고른 단어가 베일런스였죠.
타카: 베일런스는 에롤슨 씨가 낸 아이디어였나요?
에롤슨: 맞아요. 지금도 그때 썼던 메모가 어딘가 남아있을 거예요. 수많은 단어들의 어원과 유래를 살펴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타카: 당시에 제가 이해하기로는, 그때 당신은 브랜드 이름뿐 아니라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카테고리를 디자인 해야만 했죠. 시장에는 퍼포먼스 웨어라는 새로운 컨셉이 제시된 것이고요.
에롤슨: 아크로님을 처음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지 못했어요. . 아크로님을 아는 사람은 지인이거나 일부 디자이너들만이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아크테릭스와 스톤 아일랜드는 둘 다 같은 해에 퍼포먼스 의류 캡슐을 가지고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죠.. 저는 이같은 공통된 목소리가 시장에 새로운 종류의 의류의 탄생을 알리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어요. 수년간 혼자서 해보겠다는 심산이었는데, 항상 “너무 복잡해” 또는 “너무 비싸다”라는 피드백을 듣기 일쑤였죠. 그러다가 3개의 회사가 힘을 합치니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시작된 기능성 남성복이 요즘 친구들 사이에선 테크웨어로 불리는 것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테크웨어는 사실 이름이 잘못 붙여진지도 모르겠어요. 의류에 버클과 스트랩이 복잡하게 달려있는데 사실은 전혀 기능적이지 않잖아요.
타카: 10년이 지나고 보니 저도 보이는 것 같아요. 새로운 브랜드나 콜라보레이션 형식으로 이 시장에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죠. 오늘날의 퍼포먼스 웨어 시장의 흐름이 2009년에 비해 어떤 것 같나요?
에롤슨: 10년 동안 시장 전체가 우리가 이끄는 방향대로 변화한 것 같아요. 우리가 그동안 해오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시장의 큰 흐름이 되었죠. 하지만 우리 브랜드가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아크테릭스의 WaterTight 지퍼로 만들었던 첫 번째 재킷의 16번째 버전을 얼마 전에 출시했는데, 여전히 베스트셀러에요. 이 길을 오랫동안 걸어온 것 같은 느낌이죠. 베일런스와 쉐도우 프로젝트는 이 아이디어와 콘셉트를 단순히 하나의 브랜드에 머무르게 하지않고 뚜렷한 목소리와 개성을 가진 하나의 카테고리로 이끌어 냈습니다.
10년 동안 시장 전체가 우리가 이끄는 방향대로 변화한 것 같아요. 우리가 그동안 해오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시장의 큰 흐름이 되었죠. 하지만 우리 브랜드가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타카: 퍼포먼스 웨어의 인기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에롤슨: 스포츠 웨어와 퍼포먼스 웨어, 심지어는 애슬레저까지도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유는 간단하죠. 편안하고 기능적으로도 뛰어나니까요. 소비자들은 각자의 니즈에 맞게 제품을 선택하고 그것을 고유한 삶 속으로 녹여냅니다. 알파 SV 재킷에 해롤드 헌터( Harold Hunter)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죠. 남성복에는 밀리터리의류의 기능성과 상징성을 가진 제품들이 여전히 주류를 이룹니다. 리바이스 501 시리즈, 디키즈, 봄버 재킷뿐 아니라 우리가 흔히입는 티셔츠는 세계 2차 대전 당시에 속건성을 위해 미군이 개발했죠. 놀랍게도 그 전에는 모두가 긴 소매만을 입었으니까요. 지금은 티셔츠 없는 세상을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누군가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없는 것을 디자인 하고 있습니다.
타카: 최근 들어 현대 사람들이 입는 옷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의류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요. 티셔츠도 물론 그 역사의 일부이죠. 청바지, 스티커즈와 함께요. 지금은 모두가 입는 옷이지만 개발 당시로 돌아가 보면 각자의 의류에 극명한 목적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아웃도어 기술의 정점을 어떻게 생활에 밀접하게 녹여낼 수 있는지가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운 주제에요.
에롤슨: 의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도 어떤 게 기능이 좋고 어떤 게 나쁜지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3레이어 고어텍스 원단이나 WaterTight 지퍼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것들이 그냥 모양만 예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거죠.
타카: 퍼포먼스웨어의 미래는 어떻게 보시나요? 앞으로의 전망은 어떻게 될지요?
에롤슨: 그동안 우리가 깨달은 것은 우리의 지구가 한정된 자원으로 인해 시한부와도 같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같은 사실은 자연스럽게 산업에 영향을 끼칠겁니다. 지금도 벌써 불필요한 것들의 생산은 줄어들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어요. 지속 가능한 제품과 디자인의 가치가 올라가고 있죠. 더 이상 한번 입고 버리는 패스트패션의 수요는 늘어나지 않을겁니다.. 세계 2차 대전 이전의 양복 문화를 보면, 남자들이 최고의 원단을 사용해 맞춤 정장을 짜서 입었고, 시간이 지나면 옷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대물림해 아들의 신체에 맞게 다시 재단해서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죠.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소비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존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소비를 해야 하는 것이죠.
타카: 적게, 하지만 더 나은 소비를 지향하는 쪽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네요. 지속 가능성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수명이 긴 프리미엄 제품을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근본적인 측면에서 제품을 개발하는 방법을 혁신하는 것이 있죠.
에롤슨: 오늘날의 베일런스에 대해 더 이야기해 줄 게 있다면요?
타카: 현재는 원자재 개발에 집중하고 있어요. 가장 진보적인 원자재들를 고려하고 소비자들로 하여금 더 진보적인 일상경험을 할수 있게끔 하는 방법들을 생각 합니다. 우리는 매우 기술적인 접근법을 취하고 있지만 동시에 일상에서 적용가능한 것을 또한 고려하고 있어요. 다음 시즌에는 여성복의 도전을 시작합니다.. 여성 또한 남성과 같거나 더 복잡한 지리적, 생리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 퍼포먼스 웨어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요. 퍼포먼스 웨어의 오리지널 브랜드로서 우리의 임무는 더 많은 사람들을 기능적 의류의 세계로 전도하고 더 많은 기능적 옵션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롤슨: 베일런스가 성공적으로 독립하면서 테이블 모퉁이에서 진행되는 단순한 프로젝트가 아닌 뚜렷하고 결속력 있는 조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기쁩니다. 항상 잠재력은 충분했었지만, 내부 사람들이 비로소 확고한 결심을 내린 거죠. “그래, 가능성을 크게 확장시켜보자”고요. 그 결실을 보게 되어 기쁩니다. 10년, 20년의 집약체. 짜릿한 일이죠.